
기다려.
내가
해결할게.



바위

금무영琴霧英
찬바리 태생 | 여성
인간 | 20세
176cm | 보기보다 무겁다.

외관
살짝 물 빠진 듯한 갈색 머리, 같은 색의 눈을 가진 여성. 체질과 도력 성장이 영향을 끼쳐 머리색이 입학 당시에 비해 훨씬 밝아졌다. 머리칼은 가닥 가닥이 가늘어 이제 햇빛에 비추면 거의 밀밭색으로 보일 정도. 매섭게 뻗친 눈꼬리가 일견 사나운 듯도, 그 표정은 사납기보다는 매사에 무감한 듯도 하다. 그나마 인상을 부드럽게 해 주던 안경도 벗었고,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일말의 미소도 보이지 않는다.
뚫어지게 바로보는 곧은 시선 다음으로 처음 잘랐던 때에 비해 길어진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어깨 근처에서 살랑이는 머리카락은, 검은색 직사각형 핀으로 가로지른 옅은 반묶음이 되어 있다. 개량한복에 가까운 사복은 차분해 보이는 인상이다. 대부분의 의복이 검은색이며 저고리만 몇 가지 단색의 밝은 빛으로 가지고 있다. 두루마기는 실상 망토에 가까운 역할으로 소매에 팔을 꿰면 손을 밖으로 꺼내기 어려울 정도의 길이. 덮은 어깨 부분에서 장식 없는 핀 브로치로 고정한다. 저고리 안으로 항상 검은 목 티를 입고, 장갑, 앵클 부츠, 하의 안쪽까지도 검은색 의복을 받쳐 더이상 얼굴 외에 드러난 맨살이 없다. 가진 모든 옷에 어떠한 무늬도 없다.
목에 어두운 끈으로 검은색 실반지와 함께 이전 등잔모래길에서 받은 열쇠고리를 걸지만, 평상시 저고리 안으로 넣어 두어 겉에서 보일 일이 그다지 없다. 항상 현무가 새겨진 검은 손수건을 지참한다. 허리에 맨 부채집은 가죽으로 되어 있고, 노리개를 걸기 위한 장식 구멍이 있는 부분이 파란 천으로 감싸였다. 왼쪽 귀 : 귓바퀴에 옥색 링 피어싱 2개, 귓볼에 청량산파 전 가주의 머리카락으로 만들어진 매듭 귀걸이. 오른쪽 귀 : 귓볼에 왼쪽과 같은 매듭 귀걸이. 부채집 뒷쪽으로 쓰지 않는 안경을 항상 꽂고 다닌다. 떠나신 스승에 대한 동경의 표시.










“ …. ”
[자유로운 원칙주의]
여전히 성실하며 수련과 단련에 무엇을 아끼지 않는다. 찍어낸 듯 바람직한 하루 일정, 일정 이후에도 계획되어 있는 자신만의 시간표를 따라 움직이며, 밤잠이 적고 하루 일정이 굉장히 빽빽하게 채워진 편. 스스로 원칙, 규칙을 지키는 것을 중시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규칙을 대하는 태도에는 엄격하게 굴지 않는다. 규칙을 지키는 것 이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스스로도 망설임 없이 그 선을 넘는다.
“ …. ”
[무겁게 단련된]
매사에 진중하며 고집이 있다. 그러한 태도와 상당한 체격으로 행동 하나하나 묵직한 힘, 무게 같은 것이 느껴진다. 어렸을 때부터 엄격한 생활 아래서 자라 온 기색이 보인다. 집안 가풍의 영향으로, 어떤 고난이나 갈등 사이에 놓이더라도 버티고 서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러한 상황에 체력적인 문제가 큰 영향을 끼친다 생각하여 기초체력 단련, 체술 수련에 크게 시간을 쓰고 있다. 명상에 쓰는 시간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즐겨 하는 듯하다. 오랜 수련의 결과인지, 어린 나이이나 이제 도사로서도 꽤나 전문성이 느껴진다.
“ …. ”
[절벽에 부딪혀 스러지는 파도]
무뚝뚝한 얼굴로 앉아 있지만 이제 누군가는 그 내면의 감정의 파도를 엿보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도사의 재목으로서 받아온 훈련들과 집안 분위기로 인해 무엇이든 크게 내색하지 않는 무기질한 겉모습이 되었지만, 그 내면에는 아직 강렬하고 다양한 감정들이 파도치고 있다.
… 졸업 전 방학, 밀호 마을에서의 전투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지 않는다. 도박이나 내기도 걸지 않고, 소설을 읽지도 않는다. 애당초 말수 자체가 많이 줄었다. 파도는 그치지 않겠지만 그 앞에 선 바위 절벽은 무영의 남은 생 이상을 버틸 것이다. 바다가 땅을 두르고 땅이 바다를 두르니 무엇이 안이고 밖이라고 하기에 어렵겠으나 그저 타인이 볼 수 있는 것은 발으로 딛고 설 땅 뿐일 것이다.
“ …. ”
[결정]
그 겉모습이 일견 자유를 잃은 듯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문의 그 누구도, 오랜 전통, 강압도 무영의 결정, 주장, 반박을 꺾을 수 없었다. 실상 양 측의 주장이 일리가 있었기에 억지에 가까운 고집이었다. 그 오랫동안 빈바리의 장長, 임금, 정부의 결정을 따르고 비호해 와 이제는 갈대로 섰던 도사들, 금가 청량산파도… 전 가주의 강한 지지로 결국은 시대의 또다른 흐름, 즉 무영의 뜻에 따라, ‘행해야 할 도에 어긋남이 없다’ 는 결론으로 소나무로서 서게 되었다. 무영의 겉모습은 그 스스로가 원하는 더 큰 자유, 자유를 위한 더욱 큰 힘을 갖는 것에 목적이 있다. 그를 위해 무영은 지금까지 보아 온 중 가장 강한 모습, 청량산파 전前 가주 금목서琴木犀의 뒷모습을 따라 굳은 바위로서 서기를 결정했다.
“ …. ”
[애정]
고르고 결정한 것이 저를 키운 청량산의 길이라고는 하나, 학도관에서의 6년이 무영의 성장에 끼친 크나큰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영은 친우들에게서 배운 것을 집안의 가르침대로 비우는 대신에 제 속에 가두고 버티는 것을 택했다. 멈춘 표정 뒤, 손길에 담긴 애정을 누군가는 눈치 챌까? 무영이 원하는 자유의 기저에는 ‘무영이 판단한’ 당신들의 자유가 있다.


성격
사슬으로 매단 접부채 한 쌍.
보통 부채보다 무겁고 큰 회색 대를 가진 접부채 두 개를 적절한 길이의 쇠사슬으로 매달아 두었다.
쇠사슬은 매 방학에 신장에 맞추어 가운데에 새것을 연결해 길이를 늘린다.
가장 바깥쪽 살을 철제로 댄 일종의 철선으로,
무영이 골랐다기보다는 금琴가의 도사들이 대대로 접부채를 신기로 많이 이용하였고
거기에 사슬이나 끈을 달아 체술, 도술 양면으로 이용해 온 것이 현대까지 이어져,
금琴가 청량산파의 도사들은 양성 과정에서 대부분 이러한 생김새의 신기를 사용한다.
무영 것은 바깥은 묵직한 철, 안쪽은 종이를 대어 만든 부채로 연한 보랏빛 나팔꽃 덩굴이 그려져 있다.



신기
기타
[ 금琴씨 도사 ]
금琴씨 성을 가진 사람들 중 관향인 봉화읍 근처 대대로 도술을 이어 내려오는 종파의 사람들을 금가琴家 청량산파派 도사라 한다. 힘이 강대하거나 크게 유명하지는 않으나 그들이 금씨 성을 사용하기도 전부터 도사들의 대가 끊기지 않고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고 하여 도사들 사이에서는 자부심을 크게 갖는 가문이다.
무영은 분가 태생이나, 도술에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시대의 흐름으로 약해진 가문의 힘, 또 현대 사회의 문제를 제하고서도 영문 모를 이유로 급격히 손이 귀해진 것에 시름하던 청량산파 종가에서 이 재목을 눈여겨보아, 무영이 3세 때 종가의 어린 자들이 모여 도술 수련을 하던 청량사 근방으로 데리고 왔다. 무영은 몇몇 언니들과 수련관에서 자랐으며, 어리고 뛰어난 인재를 하나라도 더 보호하려는 가문의 입장을 따라 초등학교 2학년 이후로는 학교에 가지 않고 청량산 수련관에서 계속 홈스쿨링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정길의 난, 향천관 휴교 이후 정규교육 문제로 수련관의 어린 도사들이 빈바리 사회로 들어가며 급격히 불거진 청량산파 내 세대간 갈등으로, 언니들은 모두 청량산을 떠났고 이제는 실상 무영 혼자만이 금가 청량산파의 후계라 할 수 있는 상태이다. 본래 대를 이어 도사를 양성하며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후계를 가르치던 종가는 향천관 재건 소식에 무영의 성장과 보호, 그 이후 가문의 부흥까지 바라보며 무영을 향천관으로 입학시킨다.
… 금가 청량산파라 하면 예로부터 절제와, 세속에서 멀어진 자연의 삶을 미덕으로 여기고 행하였다. 또한 도道를 따르는 것의 일환으로 재해나 재난, 거대한 악의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도술을 행하여 지켜내는 것을 의무, 도道로 후계에 가르치며, 그러한 고난의 물살이 때로는 인간성을 흔드는 동료간의 갈등, 무거운 슬픔, 유혹 등으로 온다는 것을 알기에 도사들 개개인으로서의 감정을 누르고 그저 바위처럼 그러한 물살에 맞서도록 말한다. 엄격한 가르침에 버티지 못하는 도사들은 어리다면 다른 가정으로의 입양, 또는 서류 수정으로 본本을 바꾸어 청량산파의 금 씨 도사가 아니도록 하기 때문에 비교적 수가 적다. 또한 아주 예로부터 임금 되는 자를 따라 왔기에 (가문 내의 의견을 모아, 새로운 임금의 자질이 보였다 판단한다면 군사혁명 등도 막지 않는다. 임금을 빈바리의 대표로 취급한다.), 현재도 도사등록제가 행해야 할 도에 어긋남이 없다 판단하여 나라(특재청)의 의견에 따르는 것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갈대 도사로써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 청량산의 가장 높은 바위 ]
비도교 사태 이전에는 기맥 뒤틀림과 도력 폭주로, 사태 이후로는 급격히 많아진 이상현상으로 위험한 곳으로 적은 인력을 돌려야 하는 청량산파는 이른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청량산의 가주 금목서 또한 지속적으로 위험에 들어서야 했기에, 그 후계를 가르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갖고자 내정되어 있던 차기 가주 금무영을 정식으로 가주 자리에 세웠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영이 갖게 된 그 지위가, 굳은 사회인 청량산파 내에서 갈대를 소나무로 비트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웠음은 당연할 것이다. 그와 함께 분가 태생의 소나무 도사로 빈바리 사회에 숨어 있던 무영의 친부모, 금산수琴山水, 위현우魏弦羽가 금가 청량산파 본가로 들어왔다. 무영이 일을 배우는 동안 금목서, 금산수, 위현우 세 도사가 실질적인 업무를 처리하여, 무영은 졸업 준비를 위해 학도관으로 돌아올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입소문에 오를 만한 일이었기에, 청량산파를 알고 있는, 소문에 밝은 도사 가문이라면 이러한 내역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 친우 ]
향천학도관에 오기 전 무영의 단 하나의 친구, 빈바리, 무영이 운동을 가르쳤던 체육특기생. 무영은 안녕제 이후로, 계속 주고 받아 온 편지의 답장을 뜸히 하기 시작했다. 서운함을 토로하는 편지가 답장 없이도 몇 번이나 도착했지만, 그것을 달래고, 변하지 않을 애정을 가졌음을 맹세하고 전하는 답장 한 통을 마지막으로 무영은 더 이상 그로부터 오는 편지에 답장하지 않았다.
[ 카메라 ]
더이상 속세 물건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꺼려하는 듯한 모습이다. 대신 아직까지도 나비에게 선물받았던 사진기만큼은 마음에 들어해서, 이제는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 특히 꽃, 사람 사진을 많이 찍는 것 같다. 인화한 사진이 집에 잔뜩 있다.
[ 시력교정술 ]
밀호 마을에서 얻은 허리(옆구리)의 상처가 낫는 동안 별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그사이에 라섹 수술을 받았다. 상처 때문에 계속 약을 복용하고 자생술을 사용하여 회복이 빨랐다. 부작용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시야가 한층 뚜렷해졌다. 만족. 허리에는 세 갈래의 찢어진 듯한 흉이 남았다.
(*밀호 마을- 임제들 프로필 참고)

